신을 버린 세계 - 4. 여명
4. 여명
누군가의 피, 누군가의 눈물.
산 자와 죽은 자, 미친 자, 그리고 다시 일어선 자.
광기, 착란, 공황, 공포, 증오, 분노, 살의.
비명과 총명.
그리고…… 웃음소리?
“핫?”
약하게, 그리고 천천히 날이 밝아오고 있다.
“하아.”
주변에는 아무 것도 없다. 캠프도, 시체도, 비명도, 총성도, 광기도, 그리고 좀비도.
“살았……다?”
조금씩이지만 푸른빛으로 변해가는 하늘. 하얗게 변해가는 구름.
보랏빛 하늘과 회색빛 구름과는 다른 맑은 하늘.
“어떻게…… 쿨럭!”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터져 버릴 듯 뛰는 심장. 평소에는 느끼지 못 했던, 너무 익숙해서 알 수 없었던 느낌.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격렬하게 펌프질을 하는 심장과 전신을 누비며 신경을 자극하는 혈류. 솟구치는 혈압에 눈이라도 충혈 됐는지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
“크학! 칵! 흐으으으으으으윽…….”
심장에 이어 이번에는 폐가 폭발했다.
산소가 부족하다. 폐가 터질 듯이 숨을 몰아쉬고 있지만 날뛰는 심장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큽! 우엑!”
심장과 폐가 폭주 하는 사이에 이번에는 위가 경련을 일으켰다.
심장을 못 따라잡는 폐. 그 폐에 휘말려 경련하는 위. 다음은 뭘까.
“크악!”
뇌.
“하으윽! 흐악! 아아아아악!”
머리가 아프다. 산소가 부족한 뇌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구조 신호를 보낸다.
번개가 친다. 빨갛던 눈앞에 새하얀 빛이 번쩍이고, 귀에서는 징징거리는 이명음만 울린다. 머릿속이 울리 정도로 큰 번개가 떨어지고, 눈앞이 검게 변했다.
의식을 잃었다. 어둠은 한순간 찾아왔고, 고통은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느끼지 못 하게 됐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의식을 잃는다는 것은 뇌 기능에 일부가 단선 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통각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고(思考)는 이어진다. 몸도 움직여지지 않고, 감각도 사라졌지만 어쩐지 사고는 끊어지지 않는다.
꿈. 자각몽(自覺夢)과도 비슷한 상황이다. 육체의 기능은 무엇 하나 사용할 수 없으면서 생각만이 깨어있는 상태. 그런 게 아니면 진짜 뇌가 반쯤 죽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끄어억!”
무언가 비명 같은 소리에 무심코 돌아보니 그곳에는 흉부가 완전히 박살난 좀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전에는 제이크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남자의 좀비다.
…… 자각몽과 비슷한게 아니라 자각몽이었던 모양이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좀비와 미쳐서 거기로 달려드는 인간. 또는 인간에게 달려드는 인간. 그런 인간을 쏴버리는 인간. 종국에는 좀비도 인간도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인간도 좀비도 서로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다.
인간도 좀비도 똑같다. 인간과 좀비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인간과 좀비가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좀비가 아무리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그것은 분명한 시체.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움직임이 굼뜨다는 것 외에는 전혀 차이를 모르겠다. 그리고…….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중간에 좀비들이 습격해오긴 했지만 그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당연히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쪽은 캠프 인원들이니 대부분 얼굴을 알고 있어야 정상이다.
전혀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연구원 복장의 좀비.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경호원.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안내원.
완전히 뒤죽박죽이다.
“아아악!”
누군가가 또 당한 모양이다. 좀비는 비명을 지르지 않으니까.
“끄윽, 흐윽!”
바닥에 쓰러진 자가 이쪽을 본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그리고 상반신의 절반이 없는 남자가 이쪽을 보고 있다.
인간이 아니라면 고통에 비명 지르는 않는다. 인간이 아니라면 눈물 흘리지 않는다.
좀비가 아니라면 이미 죽었어야 한다. 좀비가 아니라면 움직이지조차 못한다.
그리고 저 얼굴은 도대체 누구인지 모르겠다.
그래. 그래서 도망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신이 무너지려는 순간, 몸이 먼저 도망치고 있었다.
비명과 총성을 뒤로 하고. 피와 눈물, 산 자와 죽은 자를 뒤로 한 채 달렸다.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달린 것이다.
차라리 뇌에 산소가 가지 않도록, 그래서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리지 못 하도록.
이미 눈치 채버린 일이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면, 혹시 그러면 잊어버리지 않을까. 혹시 그러면 진실을 알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날이 밝을 때까지 달린 것이다.
“선생! 정신 차려, 선생!”
“후우…….”
“그래! 그거야. 그렇게 심호흡을 하라고!”
“하아…….”
“어때 조금 안정 된 것 같은데?”
정신이 든 것은 어느 정도 날이 밝은 뒤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5시나 6시정도라고 생각한다. 기절을 한 것은 막 동이 틀 무렵이었으니 생각보다 긴 시간이 흐른 것은 아니었다.
“나라고 선생. 나 알아보겠어?”
“하아…….”
“아직 숨이 진정 되지 않은 거야?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쉬어보라구.”
“지금 건 한숨입니다.”
무언가 정리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방해를 받는 것은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다. 일단은 걱정이 돼서 그런 것이니 뭐라고 할 맘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불쾌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다.
“…….”
무언가 엄청난 것을 알게 됐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 분명히 알게 됐는데, 그게 무엇이지를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의식 자체가 그것을 생각 못하게 닫아버렸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위험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지식. 도대체 어떤 수준의 문제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확실한건 좀비에 대한 거라는 건데.”
“좀비가 어쨌다고?”
좀비라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렛. 아무리 베테랑 용병이라고 해도 어제와 같은 일은 쉽게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거의 다 온 거 아닌가요?”
“응? 아아, 슬슬이지.”
간밤에 있었던 광기 어린 전쟁. 바렛은 최대한 제정신을 챙긴 용병들을 중심으로 진형을 짜고 연구원들을 대비 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지는 못 했다.
용병들의 무장은 대부분 산탄을 사용하는 것들이다. 밤에 급하게 모인 인원인 만큼 탄약을 그리 많이 챙기지는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순식간에 잔탄이 떨어지고 수세로 몰린 것이다. 그나마 죽은 용병의 무기를 사용해서 조금 더 버티기도 했지만 그런 방법으로는 사방에서 일어서는 좀비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남은 방법은 후퇴 뿐. 이미 도망친 연구원들의 뒤를 따라 용병들도 제각각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고 상황이 진정 되면 다시 캠프로 모이라는 명령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다시 캠프로 돌아가는 중이다. 다시 캠프로 오라는 명령은 왜 내렸냐고 물어보니 바렛은 이렇게 대답했다.
“탄약에 식량에 물통까지 다 캠프에 있다고. 맨몸에 빈 총 하나로는 도저히 살아 돌아가 수가 없어.”
확실히 맞는 말이다. 먹을 것 하나, 물 한 방울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이 위험지역이다. 안전한 식량과 물, 그리고 무기까지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잠깐. 거의 다 왔어.”
캠프가 간신히 보일 때쯤 바렛이 신호를 보냈다.
“여기서 부터가 중요해, 선생. 좀비가 어디에 널브러져 있는 줄 모르니까 말이야.”
대답은 필요 없다. 단지 여차 하면 도망갈 수 있는 자세로 천천히 전진할 뿐이다.